의심하게 되면 보이는 것
주인공 홍지효는 학창 시절부터 외계인이 보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실체는 없고 지효의 눈에만 보인다.
마지막 화에서는 남자친구 이시국 역시 똑같은 외계인을 보게 된다. 이들이 외계인 환각을 보는 이유는 외계인과 접촉을 했기 때문인데,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뇌가 익숙한 이미지로 대체하는 '스크린 이미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외계인 접촉은 새로운 경험의 충격, 외계인 환각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의문이다. 이 드라마의 설정과 주제는 새로운 무언가를 접한 사람들이 자신이 인지하던 사회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면서 의문을 품는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외계인이 없는 세상에서 외계인 납치를 경험하는 것, 신이 증명되지 않은 세상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국가나 집단에 의해 불이익을 받고 버림받는 것, 우연한 사고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는 것, 오랜 시간 깊게 믿어온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 모두 믿음에 금이 갈만한 충격적인 경험이다.
홍지효는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은유일 뿐이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허보라와 함께하며 기존의 생가을 부정하는 무언가를 느꼈고, 문제는 주인공 홍지효가 그런 의심을 부정하고 억누르면서 살아왔다는 것. 기존의 사회 가치관을 깨는 생각을 본드라는 비정상적인 약물의 결과로 치부하고 내면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 시국과 부모님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지효가 외면하던 의문은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로 나타나 도망칠 수 없게 쫓아온다.
무언가를 굳게 믿는 사람
정다빈 배우가 연기한 광신도 김영기는 늦게 등장했지만 임팩트 있는 캐릭터였다. 정체가 김직진의 딸이었던 만큼 중요한 역할이기도 했는데, 영기는 어릴 적 하늘빛 들림 교회의 광신도였던 외할머니의 집단 자살장면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방황하다가 가출을 한다. 김직진은 딸이 납치된 줄 알고 추적을 시작했지만, 이내 곧 납치가 아니라 세뇌가 되었음을 알고 하늘빛 들림 교회에 잠입해 4년간 활동한다.
김영기는 모든 광신도들을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그들이 왜 이상한 사이비에 빠졌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세한 개인사를 통해 표현하는 인물이다. 영기는 어린 나이에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겪었고,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외할머니의 자살을 합리화하는 사이비 종료의 내용을 믿는 선택을 하게 된다. 연약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영기는 사이비 신도 캐릭터인 동시에 무언가를 굳게 믿는 모든 사람을 표현했다.
뭘 믿는지는 내 마음이지
10대 시절 허보라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효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보라를 믿는다고 말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면서 말이다. 그러자 보라는 자기 말도 근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냐고 지효에게 되묻고, 지효는 "내 맘이다 뭐"라고 말하며 수줍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드라마에 여러 번 나왔던 말이 있다. '그놈의 근거 좀 그만 찾아라, 이 세상에 근거 있어서 생기는 일이 몇 가지나 있다고 그러냐'라는 대사이다. 결국 홍지효가 믿는 건 허보라이다. 허보라의 말이나 근거나 논리가 아니라, 내 친구 보라라는 사람을 믿은 것이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세상이 근거라고 하는 허술한 문서나 사진, 영상이 아니라 서로 신뢰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효의 말대로 뭘 믿는지는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숨어있는 퀴어코드
드라마 <글리치>에는 동성애 코드가 깔려있다고 느껴진다.
홍지효와 허보라는 서로 친구이상의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고, 남자친구를 아끼지만 진정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던 지효의 태도는 물론 지효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오세희의 행동을 김병조 경사가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놓고 강하게 어필하고 있지는 않는다. 이 드라마가 말하는 것이, 세상에 깔려있는 기존의 가치관과 그것에 눌려 자신의 진실을 외면해 오던 주인공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리치>는 시청자를 납치한다. 외계인에게 데려가 충격을 주고,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것들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별 이상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와중에 심지어 결혼할 남자친구가 청약에 당첨되었는데도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살고 있고, 정해져 있다는 일들을 해냈는데도, 삶이 기쁘지 않거나 무기력하다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지금 그 인생이 정말 당신의 진짜 삶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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