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만들어 낸 사람
드라마 <지옥>에서 유아인 배우가 연기한 정진수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알게 되고 티베트에 가서 무언가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사람도 있고, 죽음에 대한 태도가 지나치게 탐구적이라는 것도, 그리고 보육원 출신으로 간단히 설정해 놓은 것도 비판받을만한 요소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진수라는 캐릭터는 드라마 <지옥>의 근간이 되는 세계 자체를 창조했다는 면에서 깊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상황을 정진수가 의도했거나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이후 만들어진 세계의 질서가 곧 정진수의 질서라는 면에서 정진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지옥> 전체를 이해하는 것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선고
모든것은 정진수가 20년의 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무서운 선고를 받고 정진수가 어떤 방황을 했을지, 드라마에서는 그 과정을 간략하게 묘사했지만 아마 선고를 받고 나서의 삶은 이미 정상과는 많이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정진수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흔드는 이 일, 어쩌면 정진수는 정말로 신앙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이 '고지'라는 사건, 그리고 정진수가 찾으려 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시연의 결과물들. 어쩌면 자신은 선택된 것이 아닐까, 신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의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정진수는 '그 공포가 어떤공포인지 아느냐'라고 묻지만 알 수 없어도 대략 추측할 순 있다. 20년의 시간은 정진수를 사이비 종교 집단의 우두머리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진수는 남은 20년의 시간을 자신이 죽음과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애를 썼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다소 구도자적인 태도를 내내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지옥의 왕 사탄
흔히 기독교에서 악마들의 왕이라 일컫는게 사탄이라는 존재일 것이다. 이름부터가 히브리어로 '적대자'라는 뜻이고 성경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도, 요한 묵시록에서 나타나는 붉은 용도 사탄이라고 한다. 악 중에 악, 지옥을 지배하하는 자.
인간들의 적대자, 인간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존재, 유일한 진리인 신의 품으로 가려는 인간의 발목을 잡아 이끄는 사악한 존재, 그런 의미에서 정진수는 이 세계에 나타난 사탄이고 적이라 할만하다.
사탄은 인간을 유혹한다. 정진수도 인간을 유혹한다. 인간들은 원래 시연이 뭔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았지만, 정진수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알려주려고 한다. 시연에 대해서 혹은 이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정진수는 방송에 직접 나와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열매를 먹인다. 그 지식의 열매는 정진수의 의도대로 조작된 거짓의 열매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을 먹은 인간들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모습을 드러낼 묵시록의 짐승
드라마의 마지막에 모든것은 변했다. 어쩌면 시연의 하나의 실험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연에서 하나의 예외가 등장했는데, 아기가 살아남았다. 이는 정진수가 말한 절대적인 세계관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진수는 신이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신의 대리인이 되기에는 자격이 부족했다. 정진수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이 사건에 대해서도 해석을 내놓았을 것이지만, 정진수가 없는 새 진리회는 그가 세운 교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진수의 질서는 파괴되고 그는 신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박정자의 부활이다.
박정자의 부활은 박정자의 시연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세계를 부정하고 되돌린다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영화의 순서상 박정자의 시연이 있기 바로 전에 길에서 당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정자의 부활이 의미하는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옥의 회복일까 아니면 새로운 국면의 탄생일까.
박정자의 부활은 이 세계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고, 더 큰 혼란도 준비되어 있다. 바로 정진수의 부활이다.
만약 박정자의 부활이 박정자에게만 국한된것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박정자의 부활 이후에 시연을 당한 자들의 부활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 세계를 만든 자, 혼란을 가져오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그 위에 군림한 정진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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